영해기념관

하늘비전교회 원로 오관석 목사 소개합니다.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성도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관석 목사 서울로 옮기는 과정 

태성침례교회에서 6년 목회를 하면서, 10리 안팎 다섯 마을 전체의 인원을 다 동원해도 300여명 남짓한 곳에서 300명 교인을 확보하고나니 성장의 한계를 느꼈다.

또한 그 교회는 과거에 50여평 되는 낡은 건물에 있었는데 새롭게 그 옆에 새 성전을 짓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기를 사용하는 교회로 면모를 갖추었다. 담배와 술을 먹고 주일을 성수하지 않고 십일조와는 거리가 먼 그들을 완전히 예수의 사람으로 변화 시켜서 담배와 술을 끊고 주일 성수하며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교인으로 교육하고 나니, 내가 그 교회에  무엇을 더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 다른 곳으로 떠나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여러 곳에서 초청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두 곳을 놓고 고심하였다. 한 곳은 이리침례교회이고 또 한 곳은 서울의 개척지였다. 이리침례교회는 역전 경찰서 맞은편 언덕에 넓은 대지를 소유하고 있는 교회였다. 이리에서 초청하고 있는 분들은 그 중심지에 교회를 지어 호남권의 중심 교회로 성장시켜 보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거기에 비하여 서울에서 서너 가정이 연합하여 개척하기를 요청하는 분들은 비 교적 가난하고 서민적인 여성들 들이었는데, 사모하는 마음과 열정적인 개척의지 가 있는 것을 보고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남의 터에 하나님의 교회를 시작 하지 않고 순수한 개척을 시작하는 것이 젊은 나에게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 서울로 방향을 정했다. 그러나 섬기던 태성교회는 그 사실을 알고 내가 떠나는 것을 결사적으로 만류했다.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겠다는 생각에 성탄절 예배를 마치고 출발하기로 하고 이삿짐 트럭을 예약하였다. 예배 후 이른 아침부터 이삿짐을 나르기 시작했으나 이삿짐을 붙드는 교인들, 차 앞에 누워 있는 신자들, 눈물 흘리고 매달리는 교우 들을 억지로 다독이고 권면하다 보니 몇 시간이 지난 후에야 출발하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와 퇴계로의 대한극장 주변 필동에 작은 상가 방 두칸을 얻어서 이사를 했다. 서울에 있는 교회 상황이나 목회 방법도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이사는 왔으나 교회를 세우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개척을 요청한 몇몇 교우들에게 약 일년 동안 평일 날은 집회를 다니고, 주일날은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니면서 서울 교회의 상황들을 좀 배워야겠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서울 침례교회에 한 서너 주일 참석을 했다. 한 주일 참석하는 것보다는 한 교회에 두서너 번 참석해서 좀 깊이 아는 것이 목회에 유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울침례교회에서 3주째 예배를 드렸더니 안수집사님들 중에 두어 분이 오셔서 교인들의 동요가 염려되니 다른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좋겠다고 부탁을 해왔다.

그 다음에도 충현교회나 영락교회 같은 큰 교회 예배에 참석을 했으나 만만치 않은 것은 부흥집회 때 은혜 받은 교우들을 자주 만나는 일이 생겼다. 실로 목회자가 자기 교회 없이 주일날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몇 달 동안 절실히 느꼈다. 일년의 기간은 너무 길다 싶어서 2개월이 좀 지난 3월 6일, 개척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남산 기슭에 약 30여평되는 이층집 하나를 세로 얻었다. 이층은 교회로 하고, 아래층은 주택으로 하여 남산제일침례교회 간판을 붙여 놓고 남대문 옆 여성회관을 빌려서 한 주간 전도 부흥집회를 했다. 월요일 밤부터 금요일 밤까지 5일간 저녁때만 전도 집회를 하였는데 100여명이 결신하였다. 그들에게 개척하는 교회 위치와 예배 시간과 교회 이름, 담임목사 이름을 인쇄해서 일일이 나누어 주었더니 1966년 3월 6일 개척예배 드리는 날 그들이 다 출석하여 120여 명의 교우들이 예배드림으로 개척교회가 시작되었다.

조그마한 다락방 같은 곳에서 예배 시간마다 감격적인 눈물을 흘리며 뜨거운 사랑으로 믿음으로 다짐하고, 넘치는 소망 속에 교회는 성장 일로에 있었다. 예배처소가 너무 좁아서  그 당시 남산 리라초등학교 아래에 있던 중앙방송국 드라마 센터 옆에 60여평 되는 홀을 빌려서 교회 이전예배를 드렸다.


다른 교회에서 직분을 받은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들이 이명해 오셔서 같이 한 마음으로 교회를 받들다 보니 조직교회가 필요하게 되어 우선 교회 조직을 계획 했다. 교회학교와 남전도회, 여전도회, 중.고등부 그리고 제직회를 구성했다.


많은 식구들은 아니었지만 20-30여명의 유년교회학교가 구성되었다. 신학생 한 사람을 유년교회학교 부장으로 세워서 5-6명의 교사들과 함께 유년교회 학교를 출발했다. 10여명의 학생들과 신학생 한 사람을 담당으로 정하여 중. 고등부가 조직되고, 약 15명가량의 청년들이 청년회를 조직해서 교회 전반의 부흥을 위한 봉사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남전도회가 20여명의 장년으로 구성 되고, 50여 명의 주부들이 여전도회를 구성하여 초대 회장으로 손경애 권사님을 세웠다. 또한 약 30여명의 성가대를 조직하여 개척교회로서는 빠른 기간에 조직교회를 이루게 된 것이다.


교회가 날로 부흥하자 대지를 구입하여 교회를 건축할 필요를 느꼈다. 대지를 구입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 찾다 보니 남산 일대와 명동, 필동, 회현동 지역 에는 교회를 지을만한 대지를 구입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종로와 동대문, 삼양동 쪽까지 두루 다니다가 찾게 된 곳이 종로구 숭인동(신설동)에 비누공장을 하던 200여평 되는 부지였다.


그러나 개척교회로서 그 땅을 구입할 만한 경제 여건이 전혀 되지 않았다. 뜻이 있는 몇몇 성도들과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 부지로 달려가서, 7일 동안 돌아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던 것을 생각하면서 애절한 기도를 드리며 한 걸음 한 걸음 돌고 또 돌았다.


한 7개월 지나서 몇 사람들이 계약하려다 이루어지지 않았고, 또 어떤 사람이 계약을 했다가 해약했는데 그 주인이 사업적인 급한 일로 좀 싸게라도 팔겠다고 하기에 이런 때에 계약하는 것이 좋겠다는 부동산 주인의 말을 듣고 서둘러 추진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7개월 전 계약하려고 생각했을 때보다 훨씬 싼 값으로 홍정이 되어 계약하게 되었고 어려운 성도님들의 눈물겨운 대지 구입 헌금이 하나, 둘 쌓여서 대지를 구입하고 침례교단 유지재단에 등기를 마치게 되었다. 이제 대지는 구입했으나 건축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때 우리 교회는 성냥개비 하나에 불이 붙듯 건축을 위한 새 바람이 일게 되었다. 우리가 아직 남산 기슭에 개척의 털도 다 벗기 전이었고 월세 신세를 지고 있을 때였는데, 누구도 교회 짓는다는 생각을 하기 전 새벽기도에 알돈 10원 한장이 매번 강단에 올라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새벽기도회 시간에 나는 야단을 쳤다. 누가 하나님 앞에 버릇없이 10원짜리 알돈을 강단에 올려놓느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며 야단을 쳤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난 후 내 방으로 한 소년이 찾아왔는데, 그 아이 이름은 이쌍배였다.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목사님, 저는 구두 닦는 소년인데 우리 교회 아래 남산감리교회 벽돌 건물을 볼 때 우리는 언제나 저런 예배당을 짓겠는가 싶어서, 벽돌 파는 곳에 가서 물어봤더니 붉은 벽돌 한 장에 10원이라고 하기에 매일같이 벽돌 한 장씩 하나님 앞에 바치기로 했어요."

그 다음 주일 이쌍배 소년을 교우들 앞에 세워 놓고 그 얘기를 했더니, 우리 교회 건축을 위해 벽돌헌금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즉석에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구두닦이 이쌍배가 한 주일에 벽돌 7장을 하는데 나는 100장을 하겠다, 나는 200장을 하겠다, 나는 50장을 하겠다고 우후죽순처럼 손들고 결심 한 것이 우리교회의 그 유명한 벽돌헌금이다.


이 헌금이 기반이 되어 신설동 비누공장 대지위에 건축을 시작해서 우선 마련된 돈으로 1층 공사를 마쳤다. 남산제일침례교회라는 이름은 남산과 너무 멀리 떨어진 지역이 되다 보니 맞니 않는 것이 같아서 이름을 바꾸어 서울중앙침례교회 라고 개명하였다.


1970년도 동경침례회 세계대회가 있을 때 나는 침례교 총회장으로서 50여명의 교단 대위원들을 인솔하여 동경에 가서 10여 일 간 머물며 대회에 참석하고 관광을 하였다. 그때만 해도 외국에 나가는 일에 국가의 제재가 많았고, 일본에는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많다해서 우리 50여명 대위원 중에 중앙정보원 한 분이 동행하였다.


대위원들은 회의에 참석하기보다는 단체질서를 위배하고 물건 사러 다니는 등 개인행동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중앙정보원은 계속 내게 질책을 하고 나는 아침마다 드리는 예배 시간에 주의를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만해도 외국에 나가는 일이 힘들기 때문에 그 기회를 이용하여 신앙없는 초신자들이 많이 따라와 전혀 질서가 없었다.

동경대회에서 너무 신경을 많이 쓰고 과로한 탓인지 급성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내 평생 처음으로 신세를 지며 사경을 헤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 2차로 교회 확장 공사를 시작했고 교단 기금위원회의 보조도 받았으며, 젊은 목사가 질병으로 고생하면서 교회를 지으려고 하는 모습에 교우들이 감명을 받아 헌금을 드리기 시작한 것이 교회를 뒤로 확장하며 2층으로 올리는 확장공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우리 교회의 금요철야기도회는 약 1,500명가량 모여서 은혜 충만하게 이루어졌으므로 서울에서 여의도순복교회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서 철야하는 교회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나 보니 교회 좌석이 모자라서 주일에는 6부 예배를 드려야만 했다. 밀려드는 교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하로 파들어 가보기도 하고 옆으로 확장하기 위해서 교회 가까운 곳에 집을 한집, 두 집 사서 교회에 붙여 보기도 했지만 사면이 길이라 큰 문제가 되었다. 이면은 대로요 또 이면은 소로여서 결과적으로 확장에도 한계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전 계획을 세우고 대지 구입을 물색하게 된 것이, 강남지역 종합운동장 맞은 편 잠실벌에 600평의 대지를 구입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존 신설동의 대지와 건물을 다 매각한 돈은 잠실 600평대지 구입비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었다. 그렇게까지 깊이 생각지 못했던 일들이 추진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이 발생되었다.


첫째는 차를 타고도 한 시간 가까운 거리를 가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많은 교우들이 떨어져 나갔다. 유년교회학교와 중등부는 거의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고, 고등부가 10분의 2정도가 따라오고, 장년은 약 10분의 2정도는 낙오되었다.


교인은 줄고 교회 운영비는 몇 배로 늘고, 예산 없는 건축을 하다 보니 몇 억 사채와 은행 빛, 업자에게 주어야 할 공사비 등을 도저히 감당 할 수가 없었다. 비근한 예를 들면 과거에 신설동에서 전기세가25만 원이었는데 잠실로 옮겨 1,500여 평의 새 성전을 짓고 보니 전기세만도 월 280만 원이 나왔다. 거리가 먼 교인들을 모셔오는 교통수단으로 대형버스 수십 대를 주일마다 대여하다 보니 왔다 급기야 재정을 담당하던 장로 10여 명이 모두 다 사임하고 우리 교회를 떠나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어느 주일 3부 예배 시작하기 5분 전, 강단에 등단하던 하늘 붙들고 아무개, 아무개, 아무개 등 10명의 장로님들이 오늘부로 사임하고 우리교회를 떠나겠다고 하며 예배 시간에 교인들에게 인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힘을 잃고 침체되어 있는 상황에서 장로 열 사람이 동반한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을 포함하면 무려 40여 명이 넘을 것인데 그들이 다 빠져나간다고 생각하니 너무 난감하고 막막하였다. 나의 목회에서 최대 난관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닥친 일이고 엎어진 물과 같은 사건이라 쓸어 담을 수 없었다.


“하나님을 믿으라” 는 제목으로 심각하게 설교를 마친 후 떠나겠다고 하는 열명의 장로님들을 교우들 앞에 나와 서게 하고 나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덕이 없는 목사가 계획없이 큰일을 시작하여 여기서 계시는 장로님들이 이제 일에 지쳐서 더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이분들은 오늘로 모든 공직을 사임하고 우리 교회를 떠나시겠다고 합니다.”


참으로 약 8개월 동안 교회를 건축하는 기간과 일 년 동안 교회를 치리하면서 어려운 경제를 꾸려 나가느라고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심히 지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어느 곳에서 어느 제단을 섬기는 지난날의 노고를 기억 하시고 본인을 비롯하여 후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풍요로운 보상으로 갚아 주실 것을 기도드리고 박수를 쳤다. 그러자 인사를 마친 장로님들은 가운데 복도로 한 걸음 두 걸음 일렬로 걸어 나가는 것이었다.


앉아 있던 가족들도 의자에서 일어나 복도로 같이 나가는 모습을 강단에서 지켜보면서 아내와 자식들이 죽어서 시체로 나가는 것처럼 심장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교우들도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는데 마치 초상집 같은 분위기였다.


그날부터 나는 담요 하나를 가지고 지하 새벽기도실로 내려가서 흐느껴 울며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열두명 장로 중에 경제력이 있는 열 분 장로님들이 더 이상 못하겠다고 손을 털고 일어서는 마당에 어찌 목사가 교회를 꾸려 나갈 수 있겠습니까? 장로님들도 교회 파는 것을 못  보겠다고 일어서 나갔는데 목사가 교회가 압류당하여 교회에 붉은 딱지를 붙이고 출입이 금해지는 것을 눈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내 영혼을 거두셔서 그 광경만은 내 눈으로 보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전능자 하나님께서 이 곤욕스러운 현실을 해결하도록 저를 도와  주시옵소서.”


어느 날 새벽기도 시간에 강단에서 서서 예배 선언을 하고 찬송을 부르다 보니 강단에 흰 헌금 봉투 하나가 올라와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헌금 봉투를 성경 속 에 넣고 다시 강단에 엎드려서 어젯밤에 울부짖던 기도를 다시 시작했다.


몇 시간이나 기도하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그래도 그 헌금 봉투를 한번 열어 볼 생각이 나서 헌금을 빼보았더니 20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그때 문득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돕고 계신다는 확신이 생기면서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감사기도를 들렸다.


‘기도하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낙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도를 하니 500만원, 1,000만원, 2000만원의 거금이 들어 있는 봉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장로님 열분이 다 나가시던 그날, 교회의 그 딱한 형편을 듣고 안타까워하던 분들이 자기의 비상금을 털어 드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후 1년 7-8개월 만에 그 많은 빚을 다 갚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교회 버스의 계단이 발이 빠질 것같이 낡았는데 소형, 중형, 대형으로 새 버스를 구입하였고, 교회 비품들도 새로운 비품으로 정리되고 채워졌다.


또한 교우들의 모습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교회를 나가셨던 장로님들은 우리 교회에서 15분 정도 되는 곳에 동산교회를 개척했지만 갈등과 반목으로 잘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 모셔 와서 나갔던 복도로 다시 들어와 환영의 박수를 받으며 입장케 했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이 일을 생각해 보면 엄청난 하나님의 계획적인 역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장로님들이 자기 뼈를 깎아서 세운 교회인데 손을 털고 나가겠다는 결단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고심이 많았겠는가! 그런 어려운 결단을 내리게 한 것도 알고 보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였다고 생각된다. 그날에 강단에 서서 저벅저벅 밖으로 열을 지어 나가는 장로님과 가족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바라보면 목사의 모습을 지켜보던 교인들은 자기가 돕지 않고는 이 교회가 설 수 없겠다 하여 유명으로 무명으로 거금을 바쳤으니 이 어찌 우연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하나님만이 나를 살리실 수 있다 생각하고 애절하게 밤을 새워 기도 하는 목사로 만드신 일을 비롯해서, 교회를 나갔다가 2년 반에 다시 들어오신 장로님들이 체면이 없으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겸손한 모습으로 다듬어 주신일 등, 이런 복합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잠실에 자리 잡은 교회에 새로운 교인들이 들어와서 적응하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놓았으니 이 모든 것이 우리 중앙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종합적인 성장 계획이었음이 분명하다.

담임목사 : 장충만 목사

주소 : 서울특별시 송파구 백제고분로 12길 30 (잠실동 302-5)
선교국 : 02-241-2355 | 설악수양관 : 031-584-95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