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비전교회 원로 오관석 목사 소개합니다.
오관석 목사 목회시절
청신학교 예과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목회활동을 시작하였다. 신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교회 에서 주일학교 부장을 비롯해서 중ㆍ고등부와 교회 재정을 맡는 회계 집사로 작은 교회의 중요한 분야를 맡게 되었다.
한 6개월이 지나고 여름방학이 되었을 때 조치원읍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봉산동 지역에 가서 야간 노방전도를 했다. 저녁마다 일주일 이상 노방전도를 할 때에 동네의 많은 청년들이 예수 믿기로 작정을 해서 그들을 모아 놓고 예배를 드렸다.
여름에는 달빛 아래 모깃불을 피워 놓고 박수치고 찬송하며 설교를 할 수 있었으나 날이 추워지자 예배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동네 이장님께 형편을 말씀드렸더니, 동네 젊은이들을 잘 교육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개울 건너 산 밑의 자갈밭 한 30여 평 남짓한 밭뙈기 하나를 교회 터로 기증하셨다.
동네 청년들과 초년생 전도사인 나는 최병산 선생과 더불어 흙벽돌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험과 기술이 없어서 열심히 쌓은 예배당이 하루 저녁 자고 일어나면 건물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있는 것이었다. 몇 번 그런 일이 계속 되자 젊은이들은 의욕을 상실하였다.
무너진 벽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는데, 초등학교 1학년쯤으로 보이는 여자 어린아이가 동생 손을 붙잡고 벽돌교회 짓는 터 안으로 들어서더니, 눈물이 고인 내 눈을 보고 같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흘리는 눈물이 나에게는 무척 큰 위로가 되었다. 그 아이는 몇 걸음 나에게 다가서면서 “전도사님, 한 번만 더 지으면 무너지지 않을거예요” 라고 말하며 내 손에 무엇을 쥐어 주는 것이었다.
어린 꼬마가 무슨 예언의 은사를 받았는지, 그 말은 내게 더 없이 큰 힘을 실어 주는 고마운 말이었다. 그 아이가 내 손에 쥐어 준 것은 끈적끈적한 박하사탕 이었다. 절반쯤은 녹아서 흑사탕이 될 만큼 손바닥 주름 때가 박혀 있는 박하사탕을 굳이 내 입에 넣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의 행동이 너무 사랑스러워 박하사탕이고 흑사탕이라고 가릴 것 없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 아이는 깨진 벽돌을 밀어서 개울로 굴리는 것이었다. 아이의 그 모습에 나는 다시 힘을 얻어 건물을 지었고, 동네 젊은이들도 기술은 부족하지만 열심히 동참해 주었다. 경험이 없으신 나의 아버지께서 그 교회를 건축하는 데 일조를 하셨다.
봉산교회를 건축한 후 입당예배를 드릴 때 많은 이들의 눈물과 감격 속에 예배를 드렸다.
그 어린 주일학교 학생 역시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그 교회는 오늘날 조치원 봉산동 침례교회로 크게 성장하였다.
많은 세월이 흐른 후, 충청북도 제천에 부흥강사로 부흥회를 인도하러갔다.
낮 집회를 마치고 여관방에 앉아 마당의 꽃밭을 내려다보면서 다른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어떤 젊은 부인이 초등학교 3학년 정도 된 남자아이를 데리고 여관 문으로 들어오면서 “목사님”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그 젊은 부인은 나를 바라보고 “목사님, 저 아시겠어요? 하고 물었다.
수십 군데, 수백 군데 매주일 장소를 옮겨가며 부흥집회를 하는 나에게 자기를 알겠느냐고 묻는 것은 어디서 틀림없이 밥을 사주었든지, 차로 모시는 기회가 있었든지, 자기 집에 강사 숙소를 정했든지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모르겠다고 할 수도 없어서 “글쎄요, 어디서 본 것 같은데요?” 했더니 그 젊은 부인이 “목사님은 저를 모르실 거에요” 라고 말했다.
나는 난처해졌다. 아무 소리 안하고 앉아 있는 나에게 “목사님, 옛날에 조치원 봉산동교회 전도사로 계셨지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아니, 집사님이 나를 어떻게 아시오?” 라고 묻자, 그 부인은 “흙벽돌 예배당을 지을 때 무너졌지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 일을 어떻게 아나’ 의아해 하고 있자, 그 젊은 여집사가 “전도사님 혼자 계실 때 제 동생하고 전도사님 찾아갔는데요”라고 말하였다. 바로 그때에 내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새까매진 박하사탕이었다.
“그때 박하사탕을 내게 주었지.”
그 여집사는 박하사탕 준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내 옆에 앉았던 그 분의 담임목사님이 나에게 하는 말이 “목사님, 저 최 집사님을 잘 아시는군요. 우리 교회 400여 명 교인 중에 최 집사님이 저를 제일 잘 돕는 집사님이십니다” 라고 하였다. 내 경험으로 보면 주의 종을 잘 돕는 사람은 어릴때부터 돕는 은사가 있는 것 같다.
한편 봉산동교회는 최병산 선생이 신학교에 입학하고 그 교회를 맡아서 목양 하게 되었다. 조치원에서 약 5km 가량 떨어져 있는 충청북도 청원군 강서면 봉산리 40여호 작은 마을에, 두 아들을 데리고 가난하게 사는 나이 많은 과부 남 집사님이 4~5리 가량 떨어져 있는 곳의 기독교 장로교회에 출석하던 교인들과 함께 자기 동네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침례교회 개척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그곳에 가서 전도부장인 신혁군 목사님을 모시고 개척 예배를 드리고, 조치원침례교회 담임목사인 유영근 목사님을 사무처리회 회장 및 담임목사님으로 삼고 봉산리에 새로운 기도처를 세웠다.
그 교회는 가난하고 나이 많은 남 집사님 한 분이 주동이 되어서 김 집사님과 몇몇 여자분들, 젊은 청년들과 함께 주일과 수요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그 교회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다 보면 볼이다 찢어지는 것 같고 손과 발이 얼어터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설교를 마치고 나면 남 집사님은 가슴에 계란 한 알을 품고 있다가 웃방으로 나를 이끌고 가서, 품었던 계란 한 알을 깨서 내 입에 넣어주며 억지로 먹게 한다. 이것을 알게 된 그 교회 여집사님들은 서로 경쟁이 붙어 계란을 품고 와서 먼저 대접하려고 나를 끌고 웃방으로 올라가다가 김 집사님의 계란이 깨진 적도 있다. 그분들이 그 아기자기한 사랑을 주님을 위해서 사는 목회자 외에 누가 받을 수 있겠는가!
그 교회 후임자들은 명확히는 모르지만 대략 이렇다. 안종만 목사님, 최병산 목사님, 유병문 목사님 그리고 세월이 많이 지난 후에 최이식 목사님도 그 교회를 거쳐 가셨다. 지금 한국 침례교회의 저명한 목사님들이 거의 그 교회를 거쳐 가셨다는 말이다.